“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오늘, 우리는 너무나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수십 년째 반복되고 있는 스포츠계의 인권유린과 폭력의 카르텔 속에서 급기야 소중한 생명이 우리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는 마지막 말을 던지기까지, 故 최숙현 선수가 겪어야 했을 고통 앞에서, 할 말을 잃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몸과 마음을 곧추세워 다짐해 봅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시는 이 같은 인권유린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최 선수가 우리 곁을 떠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회적 기회’가 있었습니까.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 철인3종 협회, 경주시청과 경주경찰서까지 어느 곳 하나 최 선수를 보호하고 진상 규명을 위해 제대로 실효성 있게 작동된 곳이 없습니다. 체육인 출신의 차관이 부임한 문화체육관광부는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2019년 조재범 성폭력 사건에서부터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없이 반복되었던 폭력·성폭력 사건의 처리 과정까지. 늘 철저한 조사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고, 체육계의 변화를 얘기했습니다. 그 약속이 제대로 지켜졌다면 최 선수와 같은 비극은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를 비롯한 관계기관의 통렬한 반성과 책임있는 태도와 답변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번 사건은 최 선수의 감독과 팀 닥터, 그리고 선배선수의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근원에는 ‘성적 지상주의’ ‘승리 지상주의’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종목이나 연령, 성별, 분야를 불문하고 수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온 스포츠계의 인권유린은 성적과 메달, 승리라는 명분에 가려져 온존해 왔습니다. 성적을 위해서라면 지도자의 폭행과 강압적인 훈련, 군대를 방불케 하는 위계적이고 복종적인 문화, 외부와 차단된 합숙훈련 등 모든 것이 무마되고 은폐되고 축소되어 왔습니다. 꼬리자르기식 수사와 솜방망이 처벌, 지켜지지 않는 재발방지 약속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아무리 가해자를 엄벌하고 강력한 피해자 보호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것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적지상주의와 그것을 유지시키는 체육계의 구조와 패러다임이 바뀌지 않는 한 스포츠계의 인권유린은 뿌리 뽑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해 스포츠 미투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체육계의 인권침해에 대한 근절책을 마련하라“(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 모두발언, 2019. 1.14,)는 지시에 따라 문체부 등 정부기관과 민간 전문가가 참여한 스포츠혁신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2019. 2. 11~ 2020. 2. 10). 혁신위는 7차에 걸친 권고를 통해 피해자 보호와 인권침해 대응시스템을 비롯, 학교체육 정상화와 엘리트 체육 개선, 그리고 대한체육회 등 체육단체의 구조개편안과 같은 한국 스포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대한체육회는 시종일관 이를 무시하고 반대하고 이행하지 않았으며 이를 관리감독 할 문체부 또한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음으로써 오늘의 비극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라는 故 최숙현 선수의 요청에 늦었지만 굳게 다짐하고자 합니다. 이번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함께, 체육계 폭력의 카르텔을 끊어내고 메달과 성적이 아닌 인권과 행복을 추구하는 체육계의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위해 다음의 사항을 촉구합니다.
첫째,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많은 전·현직 선수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해자는 가혹행위를 부인하고 있고, 팀 닥터라 불리는 자격 미상의 인물은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끔직한 인권유린의 실태는 물론, 최 선수를 절망케했던 피해자 보호기관 및 관련자의 대응, 은폐 시도 및 2차 가해, 사건 발생 이후 보고여부, 체육단체장의 대응 및 책임, 피해자 권리구제 시스템 등 모든 문제점이 숨김없이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가해자에게는 엄정한 처벌이, 피해자에게는 2차 가해로부터 보호받고 이후에도 생활과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둘째, 대한체육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진상조사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조사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무능하게 이 사태를 방치해 왔고 결국은 최 선수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던 이들에게 진상조사를 맡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더구나 사건이 터지고 난 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인식의 한계와 체육계 감싸기 등을 보면 현재 논의되고 있는 진상조사단은 주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가해자와 그 주변인, 대한체육회 등 체육단체 관계자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신뢰할 만한 전문인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셋째,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은 당장 사퇴해야 합니다. 작년 조재범 성폭력 사건 이후 국민들의 사퇴 요구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며 버틴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故 최숙현 선수가 2월 경찰 고소에 이어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에 가혹행위를 신고한 시점이 4월 8일입니다. 그동안 대한체육회는 과연 무엇을 했고, 이기흥 회장은 무슨 조치를 취했습니까. 그가 약속한 변화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스포츠 혁신의 변화를 잠재우고 시대역행적인 행보를 일삼은 이기흥 회장은 지난해 조재범 성폭력 사건과 이번 사태에 책임지고 당장 사퇴해야 합니다. 그리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진상조사단의 조사에 성실히 임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문화체육관광부는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조재범 성폭력 사건과 이번 사태를 비롯, 스포츠계의 광범위한 인권유린이 수십 년간 지속되도록 방치해 온 책임을 통감하고 스포츠계의 구조 및 제도개혁을 이행해야 합니다. 스포츠혁신위의 권고를 이행하겠다고 했던 엄중한 약속을 흔들림 없이 실행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다섯째, 새롭게 출범한 21대 국회에 요청합니다. 국민의 목소리를 담고 반영해야 할 국회는, 그 동안 유독 체육계의 누적된 적폐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체육계의 잘못된 관행과 구조에 대한 대대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는 이제 더 이상 늦출 수 없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가 체육계의 근본적인 구조 개혁에 적극 나설 것을 요청합니다.
잊지 않고, 또 가만히 있지 않고,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라는 故 최숙현 선수의 요청을 기억하고 답해야 합니다. 이는 시민들의 지속적인 관심 아래서만이 가능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함께 한 우리 시민사회, 인권, 여성, 체육단체들은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그리고 체육계의 근본 구조 개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철저한 진상조사, 책임자를 처벌하라!
독립성, 전문성, 신뢰성, 책임성이 보장되는 진상조사단을 구성하라!
대한체육회 이기흥 회장은 당장 사퇴하라!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는 스포츠폭력 근절과 스포츠 구조개혁을 위해
스포츠혁신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하라!
21대 국회는 진상조사, 책임자처벌, 체육계 개혁을 위해 노력하라!
2020년 7월 6일(월)
故 최숙현 선수의 마지막 요청에 답하기 위해 모인 단체 일동
(문화연대 대안체육회, 바른체육교수모임, 스포츠인권연구소, 인권과 스포츠,
전국체육교사모임, 젊은빙상인연대, 체육시민연대 /
경기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광주인권지기활짝, 국제민주연대, 김포장애인야학,
나야장애인인권교육센터,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 노들장애인야학,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노란들판, 다산인권센터,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블랙리스트타파와공공성회복을위한연극인회의,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에코팜므, 여성환경연대,
예술대학생 네트워크, 인권운동공간 활,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 장애여성공감,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장애인배움터 너른마당,
장애인자립생활센터판,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장애해방열사단,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국여성연대,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천주교 남자수도회 정의평화환경위원회,
천주교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뇌병변장애인인권협회,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한국장애포럼(KDF),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형명재단 원불교 인권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