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국민체력과 건전한 여가시간을 활용하도록 하고 체육을 통해 국위선양에 이바지 하자는 취지에서 제정된 체육의 날입니다. 아름다운 체육정신은 국력의 바탕인 굳센 체력을 더해주고 질서와 공익이 다져지는 문화국민의 자세를 돋보이게 해줍니다. 체육시민연대도 슬기에 찬 체육정신 안에 허위와 모함 없는, 눈부신 생활풍토가 조성되길 바라며 제 45회 체육의 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마냥 축하하고 기뻐할 체육의 날은 아닌 듯 싶습니다. 오늘로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에 일방적으로 내린 철거 시한이 보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2주 후면 82년 동안 힘겹게 달려온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의 심장이 멎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스포츠 스타들을 탄생시키고 국민들에게 눈물과 감동의 명승부를 보여주었던 동대문운동장이 이제 제 유명을 달리할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체육인 여러분!
진정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체육시설이 허망스럽게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만 보실 겁니까? 후손들에게 대한민국의 스포츠 역사를 회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정녕 빼앗고야 말겠습니까? 아직도 서울시의 대체구장 약속만 믿은 채 11월이 오기만을 손놓고 기다리고 계실 겁니까?
올해 3월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대신 7개 대체구장을 약속했지만 6월~11월 사이 완공(구의정수장), 2008년 2월 완공(신월정수정)을 자신했던 대체구장 건립은 첫 삽도 뜨지 못한 상황입니다.
공사시기를 놓친 7월에는 야구장 짓는데 4개월이면 충분하다고 하더니, 최근 구의정수장이 근대문화재로 등록예고 되고 나서는 400석 규모의 간이야구장은 인조잔디만 깔면 한 달 이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며칠 전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에서 제공한 서울시와 대한야구협회 관계자의 대화에서는 ‘올해 안에 구의정수장, 신월정수장 야구장을 완공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서울시의 작태를 보십시오. 마치 이솝우화의 ‘양치기소년’을 보는 듯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선량한 마을 주민들은 양치기소년을 세 번이나 믿어줬지만 우리들은 서울시에 벌써 몇 번을 속고 있는 겁니까?
이는 단순히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 형국을 넘어 사태는 악화되는데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대책 없는 대책만 양산하고 있는 꼴인 것입니다.
결국 동대문운동장 철거와 대체구장 건립은 서울시의 허울뿐인 정책이었으며 절차는 철저히 무시한 무모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7월 체육시민연대와 프로야구선수협은 서울시 도심활성화추진단 고위관계자와 면담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서울시의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계획을 무작정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리모델링해서 소통형 공원으로 재탄생 시키는 문제도 고려해 달라는 제안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시 관계자는 ‘유명 외국 건축가에게 공원 설계까지 맡긴 마당에 이제 와서 계획을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동대문운동장 철거를 결정하면서 ‘우리나라의 야구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놀랐다’며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는 대신 7개 대체구장 건립해 주기로 야구계와 합의가 됐으니 절차상 문제될 건 없다고도 했습니다.
우선 그가 현 야구계 문제에 대해 우리와 인식을 같이 한다는 점은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야구 인프라가 그렇게 놀랄 정도로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면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할 계획부터 세우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인데 동대문운동장 철거를 결정하고 나서 7개의 대체구장을 마련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리고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 철거에 대해 합의했다는 ‘야구계’는 체육인, 야구팬, 그리고 서울시민 모두가 되어야 함이 마땅함에도 과정은 공개하지도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몇몇 야구계 인사와 합의서 한 장 체결한 것으로 절차상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지금도 비상대책위와 서울시는 그들만의 장소에서 그들만의 합의를 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더 큰 책임은 우리에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 100년 야구역사의 산실이자 최초의 근대체육 시설인 동대문운동장이 철거될 위기에 놓여있는데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야구계, 축구계 등 체육인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시민단체나 문화재 전문가들이 동대문운동장을 지키기 위해 먼저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진작부터 요구했어야 일곱 개의 ‘단지’를 수십 년간 간직해온 ‘화수분’과 바꾸자는 ‘양치기소년’의 거짓 약속에 속은 우리 체육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서울시의 거짓말이 속속 드러나고 있고 동대문운동장 철거 계획이 대책 없는 허울이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참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정작 늦은 것은 서울시의 약속 이행이지 우리의 실천은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체육인 여러분!
동대문운동장이 우리나라 스포츠 사에서 차지하는 가치와 역사성을 인정하신다면, 개발논리에 따른 일방적인 철거 보다는 동대문운동장이 국민의 휴식공간인 동시에 체육시설로서 공존할 수 있는 다른 활용 방안에 대해 처음부터 진지하게 논의해야 합니다. 환경단체와 문화재 전문가들이 구의정수장을 지켜내고 축구 변방 말레이시아 국민들이 철거될 위기의 메르데카 경기장을 지켜냈듯, 우리도 동대문운동장을 지켜내야 합니다. 1925년에 지어져 82년 동안 대한민국 스포츠 사를 아우르며 88서울올림픽 4위, 월드컵과 WBC 4강의 주역들을 길러낸 동대문운동장을 지켜내고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 일에 체육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고국을 잃고 나서 무성히 자란 보리를 보고 한탄만 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높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먼 훗날,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이 없음을 아쉬워하고 자녀들에게 물려줄 스포츠 유산이 없음을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동대문운동장을 운명 지을 어떠한 권한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후손들에게 100년이 될지 200년이 될지 모를 동대문운동장의 숙명을 온전히 물려주는 책임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체육인의 축제가 되어야 할 오늘, 역사적인 동대문운동장이 하릴없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체육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동대문운동장 보존에 앞장서지 못하고 체육인의 슬기를 모아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처지가 아쉬운 체육의 날입니다.
2007. 10. 15 체육의 날
-체 육 시 민 연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