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훈고 축구부 이규준 감독(왼쪽)과 연세대 체육교육과 이한주 교수가 19일 서울 신문로 경희궁 공원에서 공부하는 운동선수 육성에 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세훈기자
공부하는 운동선수. 아주 이상적인 체육인 모델이다. 그러나 한국의 학생 스포츠에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다. 선수들이 운동기계로 전락한 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다. 대학 입학과 프로 진출이라는 그들만의 지상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비판할 수도 없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지난달 운동선수의 수업 정상화와 관련된 종합대책을 발표하자 학원 스포츠 현장이 술렁대고 있다. 정부 대책은 ▲운동선수 수업권 보장 ▲전국대회 출전 횟수 3회 제한 ▲폭력사태 발생시 재정 지원 축소 및 지도자 처벌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일선 지도자 및 대학 교수들은 “현실성이 없는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공부하는 운동선수 만들기’ 정책은 취지는 좋지만 현재 입시제도 하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거라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운동선수가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을까. 공부하는 운동선수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선결돼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학원 스포츠의 양대산맥인 대학과 고교 스포츠 간 괴리는 없을까. 최근 ‘공부하는 운동선수 만들기’를 학교체육 정책으로 선언한 연세대 이한주 교수(체육교육과)와 지난해 대통령금배와 고교축구선수권대회를 석권한 장훈고 축구부 이규준 감독 겸 체육교사가 지난 19일 공부하는 운동선수 육성에 대한 폭넓은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나눴다.
〈토론자/이규준 장훈고 축구부 감독·이한주 연세대 체육교육과 교수〉
이규준 감독(이감독)=공부하는 운동선수, 가장 큰 문제는 고교 운동부다. 현실적인 목표가 대학 입학인데 전국대회가 집중된 상반기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결국 가고 싶은 대학교에 갈 수 없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 8강에 오르기 위해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 적잖은 학교가 하루에 세번씩 운동하기 때문에 선수들이 수업에 참여하기가 어렵다. 수업이 대학입학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운동선수에게 수업은 아무 의미없는 교육이다. 그나마 우리 학교는 수업을 다하고 오후에 딱 한번 운동한다. 그리고 밤에 따로 영어공부를 시킨다. 만일 모든 대학이 8강 등의 입시기준을 완전히 없애준다면 고교 선수들에게 공부를 좀더 시키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이한주 교수(이교수)=새학기에 농구부를 중심으로 수업 출석을 적극 유도하고 있다. 사실 현실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에 앞서 우선 수업 참석의 버릇을 들이는 게 1차 목표다. 선수들은 달가워 하지 않는다. 운동을 하느라 피곤한데 공부는 왜 하느냐는 투다. 물론 어릴 때부터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어 한편으로 이해는 간다.
운동부 학생들은 운동 위주고 공부가 뒷전인 게 현실이다. 하지만 운동을 아무리 잘 한다고 해도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는데 4년 만에 모두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리고 운동을 잘하는 선수들은 프로에 가겠지만 그렇지 못한 선수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고민이었다.
이감독=전국대회 성적 기준이 없어지면 고교 감독은 좋지만 현실적인 문제점이 많다. 모든 대학이 완전한 공개모집을 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많은 과제를 안고 있다. 또 이교수의 지적대로 선수 선발은 감독의 개인적인 의견에 따라 결정되는 만큼 입시부정이 더 생길 수도 있다. 대학은 우리나라 스포츠의 중심이다. 예전에는 체육학과를 나오면 교사로 임용됐지만 요즘은 그런 것들도 없어지면서 대학교 운동부가 줄고 있다는 점, 고등학교·대학교가 모두 프로로 가기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교수=연세대의 경우 학교 차원에서 결정을 내린다면 입시기준을 바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나도 8강 등 성적을 요구하는 현 제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대회 성적기준을 없앤다면 또다른 대입선발 기준으로 어떤 게 있냐는 점이다. 검은 거래, 끼워넣기 등을 막을 제어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힘들다. 또 모든 대학이 이기기 위해 좋은 선수를 스카우트하는데 만일 우리 학교 체육부의 성적이 계속 좋지 않을 경우 학교와 동문 분위기를 무시하고 이같은 체육교육을 계속 밀어붙일 수 있을까도 무척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이감독=선수들을 공부시키는 대안마련이 쉽지 않다. 대부분의 고교 운동부는 합숙을 하는데 그 시간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도 밤 시간에 외부 강사를 초빙해 영어공부를 따로 시킨다. 매주 시험을 봐서 성적이 나쁘면 체벌도 한다. 오죽하면 “영어공부를 시키는 게 싫어서 장훈고에 가지 않겠다”는 선수들까지 나올까. 물론 교내 다른 선생님들에게 운동부만을 위해서 가외로 수업을 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도 고민스럽다.
이교수=우리 학교도 숙소내 세미나실에서 밤이나 늦은 오후에 운동부 학생들에게 운동생리학 등을 교육시킨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수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효과는 크게 높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체육교육과 내에서 운동이 아닌 영어·한문 등 다른 과목을 개설하는 것은 어렵다. 그나마 특강 형식으로 이뤄진다면 가능할 법하다. 운동부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감독이다. 감독이 공부를 중요시하면 선수들은 따라간다. 우리 학교 럭비부 같은 경우가 좋은 예다. 럭비부는 졸업 후 럭비로만 먹고 살 수 없는 만큼 수업을 부지런히 들으면서 교사임용고시 등을 준비한다.
이감독=대학에서 선수의 꿈을 접은 학생들을 위해 지도자학과, 피지컬 트레이너학과, 스포츠 에이전트학과 등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운동을 못한다고 지도자까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이교수=지금 연구중이다. 일단 그와 비슷한 것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선수로 성공할 수 없는 학생들이 교사·지도자·트레이너 등 관련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전문 커리큘럼을 만드는 식이다. 또 우리나라는 2000년부터 체육특기자는 무조건 체육관련 학과에 들어가는 것으로 관련 규정이 바뀌었는데 지금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운동부 학생들이 다른 학과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다양한 사람들과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다. 최소한 지금처럼 운동부 학생들이 같은 운동부끼리만 어울리면서 다른 사람들을 접할 기회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것은 개선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감독=고교 전국대회를 모두 없애고 모두 지역 리그제로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주말마다 인근 학교와 리그경기를 지속적으로 치르면 주중 수업에 지장없이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있다.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 선결돼야 한다. 일본의 운동부 학생들은 정규 수업 모두 다 하고 늦은 오후나 밤에 운동한다. 조명시설이 마련된 좋은 운동장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규격에 맞는 맨땅 운동장도 부족한 데다 잔디 구장을 빌리는 일이 전쟁과 같다. 아이스하키팀의 경우에는 체육관 대관 시간 때문에 새벽 1시에 운동을 하고 있으니 공부를 할 수 있겠나. 결국 운동부 학생들은 경기장을 쓸 수 있는 시간에 맞춰 운동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공부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이교수=그런 면에서는 실내 경기장이 넉넉한 농구가 좀 낫다. 농구는 맘만 먹으면 밤이나 주말에 경기를 하고 주중에 공부를 할 수 있다. 미국대학농구단체로 알고 있는 NCAA는 사실 대학 총장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수업 출석률이 낮고 학점이 부족한 팀에는 대회 출전 횟수 제한, 스카우트상 불이익 부여, 장학생 선발 규모 축소 등의 징계를 내리고 모두 이를 지킨다. 우리 대학 농구팀도 8개밖에 없는 만큼 대학 차원에서 대승적인 결의를 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또 경기 일정을 연중으로 하지 말고 3~4개월 정도에 집중시킨다면 지도자 입장에서는 선수들을 충분히 볼 수 있고 운동부 학생 입장에서는 비시즌에 공부할 여유도 가질 수 있다.
또 하나는 감독의 평가기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오직 성적만으로 감독을 평가하지만 미국은 학생들의 수업 성적, 졸업률, 도덕성 등 평가기준이 무척 다양하다.
이감독=교육부에 할 말이 있다. 무엇보다 운동부를 바라보는 교육부의 비뚤어진 시각이 바로잡혀야 한다. 무슨 일만 생기면 운동부를 잘못된 곳으로 간주하고 매년 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죄다 새로운 것이 전혀 없는 정책뿐이다. 사실 현재 학교의 문제는 통제가 안되는 일반 학생이지 운동선수가 아니다.
담배·술·폭력은 이미 일반 학생들에게는 다반사다. 이를 바로잡지도 못하면서 단체생활 속에서 보호받고 있는 운동선수를 나무라는 것은 잘못됐다. 인성교육이 무너져가고 있지만 그나마 예절과 질서를 아는 것은 운동부 학생들이다. 교육부는 매년 지겹도록 똑같은 공문만 내려보내지 말고 운동장 등 인프라 확충, 대학입시제도 개선을 위한 대학 설득 등 현실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지금 교육부가 수업권 보장을 위해서 “전국대회는 무조건 9일 안에 끝내라”고 하지만 9일 동안 7경기를 뛰는 선수들은 정말 죽을 맛이다.
이교수=사실 개인적으로 교육부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뭔가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이 나올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우리 학교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육성하는 데 계속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성공한다면 다른 대학교뿐만 아니라 중·고교에서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으로 본다. 일반인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운동선수라면 모두 무식하다는 선입견을 버려달라는 것이다. 운동선수를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공부가 아니라 운동 능력이다. 그리고 운동 능력으로 치면 운동부 학생들은 모두 수재다. 또 무조건 좋은 성적을 내는 게 강팀이라는 의식도 달라져야 한다. 운동선수로서, 그리고 운동을 공부한 학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장 잘 가르쳐주는 팀이 강팀이다.
〈정리|김세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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